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폐비 윤씨 (문단 편집) === 중전이 되다 === [[성종(조선)|성종]]의 중전이었던 [[공혜왕후]] 한씨가 몸이 약하고, [[결혼|혼인]]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[[후궁]]을 들일 것을 청해 첫 후궁으로 간택돼 입궁하여 숙의로 책봉되었다. 1년 후 [[공혜왕후|중전]]이 승하하고, 그로부터 공혜왕후의 3년상이 끝난 2년 후 [[성종(조선)|성종]]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책봉하였다. 당시 숙의 신분이었던 윤씨를 포함해서 소용 신분이었던 [[귀인 정씨(성종)|숙용 정씨]]와 [[귀인 엄씨|숙의 엄씨]] 등 총 4명의 후궁들이 있었는데 결국 왕에게 제일 총애를 많이 받고 있었고 유일하게 임신 중이었던 윤씨가 왕비로 책봉된 것이다.[* 당시 윤씨는 [[임신]] 6개월이었다.] 또한 어렵게 자라 소박한 차림과 성격에다 친정 세력도 죽고 없고[* 윤씨의 아버지 윤기견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. 윤씨는 입궁 전 어머니와 베짜기 등을 해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.], 무엇보다 [[연산군|태아]]가 아들이라면 중전의 몸에서 원자로 출생하게 하려는 의도가 겹쳐 면접에서 높은 점수도 얻었다. >윤씨(尹氏)가 평소에 허름한 옷을 입고 검소(儉少)한 것을 숭상(崇商)하며 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으로 대하였으니, [[중전|대사]](大事)를 위촉할 만하다. 윤씨(尹氏)가 나의 이러한 의사를 알고서 사양하기를, “저는 본디 덕(德)이 없으며 과부의 집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이 없으므로 사전에서 선택하신 뜻을 저버리고 [[성종(조선)|주상]]의 거룩하고 영명한 덕에 누를 끼칠까 몹시 두렵습니다.”고 하니, 내가 이러한 말을 듣고 더욱 더 그를 현숙하게 여겼다. >---- >[[성종실록]] 69권, 성종 7년(1476) 7월 11일 임자 2번째기사 >그대 윤씨는 성품이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마음가짐이 깊고 고요하여, 계명[* 왕비가 임금이 정사에 부지런하도록 내조하는 것을 뜻한다.]의 경계는 진실로 제나라 왕비의 현명함보다 뛰어나고, 갈담의 근검[* 갈담의 근검이란 시경에 나오는 말로 후비가 여자로서의 지켜야 할 도리를 다한 것을 말한다.] 하고은 멀리 주나라 태사의 덕을 따르는도다. >---- >[[성종실록]] 70권, 성종 7년(1476) 8월 9일 기묘 2번째기사 이렇게 왕의 계비가 된 윤씨는 마침내 왕실이 고대하던 아들을 낳는데, 그 아이가 바로 왕의 [[적장자]]이자 훗날의 '''[[연산군]]'''이다. 전술했듯 연산군은 왕의 적장자였으므로 자연스레 원자 칭호를 받게 되었다.[* 원자라는 칭호 자체가 왕의 [[적장자]]를 의미한다. 후궁이 아닌 왕비에게서 난 첫아들 자체가 원자이다. 훗날 [[경종(조선)|경종]] 탄생을 둘러싼 원자정호 문제도 경종이 [[숙종(조선)|숙종]]의 [[적장자]]가 아니기에 벌어진 사건이다. 따라서 연산군에게 원자책봉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